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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일상

비보(悲報)

엘블 2015. 12. 2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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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화요일 밤. 유난히 잠이 안 오는 날이었다. 밤새 뒤척뒤척, 이리누웠다 저리누웠다가 자는 둥 마는 둥... 잠시 선잠이 들었다가 핸드폰 진동소리에 깜짝 놀라며 깼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동생이다. 안 좋은 예감에 다급히 전화를 받으니 동생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외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해 전 대장암 수술을 받고 지난 해 재발 후 전이되어 말기암으로 고생을 하셨는데.. 결국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눈을 감으신 것이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엄마아빠는 급히 병원으로 이동 하셨고, 빈소가 정해지면 연락을 하겠다며 동생은 전화를 끊었다. 동생과 짧은 전화통화를 한 뒤로 얼마간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사실 내게는 가까운 가족의 죽음이 거의 처음인 셈이었다. 어렸을 적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그 때는 너무 어릴때라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못했었고 기억도 별로 남아있지 않다. 어두운 방 안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데,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외할아버지와의 가장 큰 추억은 2007년 중국에서의 기억이다. 나는 2007년 가을부터 심양에서 동생과 어학연수를 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고향은 함경북도 철산이었는데, 심양에는 할아버지의 사촌동생들이 중국 국적으로 정착해 계셨다. 듣기론 예전에 이산가족을 찾을 때 라디오를 통해 중국에 있는 사촌동생들을 찾게 되었다고한다.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원래 고향에 계신 상태고. 그래서 중국 어학연수를 할 때 외할아버지의 추천으로 두번째 학기는 심양으로 동생과 함께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곳에서 나는 중국의 먼 친척분들을 뵐 기회가 여럿 있었다. 그 때에 외할아버지의 조카 한 분(내게는 먼 이모뻘..)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한달간 심양에 와 계셨던 적이 있었다. 그 한달간의 기억이 아직도 내 무의식에는 강렬하게 남아있다.. 외갓집이지만 그리 친척간에 긴밀한 유대관계가 없었던 터라 나는 그 때가 제일 외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친척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나와 동생 넷이 2007년 날씨 좋은 가을날 떠났던 짧은 여행의 기억이 떠오른다. 환인의 오녀산이라는 곳으로 꽤 오랜시간 동안 승용차를 운전해서 갔던 여행이었는데, 날씨도 좋았고 풍경도 아름다웠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너무 그리웠다 그 시간들이. 이미 흘러가버렸지만.

 

 지난 5월쯤이었을 거다. 암이 재발하시고도 계속 강원도에 머물고 계셨던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었는지 엄마가 강원도까지 몇번 왔다갔다 하시게 되었다. 그 때 연휴가 있었는데 나도 남편과 함께 가서 하룻밤 머물며 엄마를 도왔다. 그 때 할아버지를 오랜만에 뵈었는데 너무 말라계셨다. 쩌렁쩌렁했던 음성은 많이 약해지고.. 가슴이 아팠다. 내가 이럴진대 엄마는 얼마나 더 가슴이 아프셨을까. 엄마는 할아버지를 설득해 큰외삼촌 집과 가까운 용인의 요양병원으로 모시고 나왔다. 병원으로 옮긴 직후의 할아버지는 그래도 밝고 좋아보이셨는데... 지난 9월 다시 방문하니 그때보다 더 말라계시고 힘들어하시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색하지 않으시려고 하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너무 마음이 안 좋아 할아버지 손을 꽉 붙잡고 '할아버지 또 올게요'라고 이야기하고 돌아섰는데...그 때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나는 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는지..

 

 23일 정오즈음. 빈소가 차려진 곳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이건 꿈이 아닐까?라고 홀로 되뇌어 보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눈물부터 흘러내렸다. 엄마는 눈물을 보이셨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던터라 우려했던 것과 달리 잘 견뎌내고 계셨다. 오히려 너무 슬퍼하면 할아버지가 못떠나신다며 나를 위로해주셨다. 처음에는 슬펐던 마음이 손님을 치르는 일손을 도우면서 차차 누그러졌다.

 

 둘째날인 24일 오후..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입관이 이루어졌다. 그 때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뵈었다.. 다행히 온화한 표정이셨다. 하지만 내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소리를 내서 울 수는 없었다. 억지로 소리를 간신히 참으며 눈물을 흘리는데.. 슬퍼하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아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자정까지 빈소의 손님들을 맞이하며 있다가 집에 잠시다녀온 뒤 아침에 다시 빈소를 찾았다.

 

 25일 오전. 아침 일찍 추모예배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조금 늦어 볼 수 없었다. 원래 할아버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셨는데, 임종에 임박했을 때 교회에 다니는 큰외숙모에게 부탁해 목사님을 불러달라 했다고..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에 종교로 편한 위안을 얻으셨다면 다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버스로 추모공원까지 이동했다. 시간을 기다려 할아버지의 화장순서가 돌아왔고, 마지막으로 관이 옮겨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관 위에 덮힌 태극기가 원망스러워 보일줄이야...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화장이 끝난 후 유골을 수습하는 장면까지 지켜보았다. 임종에서 한 줌의 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이리도 허망한 것이었던가. 슬퍼하는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나는 잠시 멍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화장이 끝난 뒤 유골을 모시고 국립 현충원으로 이동했다. 6.25에 참전하셨던 할아버지는 육군 대령으로 전역하셨다고 한다. 현충원에 모셔진다고... 그래도 할아버지가 보고싶을 때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다른 두 분과 함께 현충원에서 장례식을 올린 후 납골당에 모셔지는 것 까지 보았다. 다른 가족들도 많아서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었는데... 할아버지 유골함 앞에 가족이름에 적힌 내 이름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내 몸에 분명 할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을테니. 어쩌면 할아버지는 떠나셨지만 동시에 내 안에도 머무르고 계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피붙이 한 명도 없이 홀로 내려오셔서 대한민국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시고, 아들 딸 손주 손녀까지.. 가정을 일구셨던 외할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이제 뒤돌아보지 마시고 미련가지지 마시고 눈 앞의 빛을 따라 편히 안녕히 가세요. 가끔 할아버지가 보고싶을 때, 기억하러 모신 곳에 찾아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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